Monday, October 02, 2006

21세기의 전지구적 주권과 민주주의 :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출처 : 교수신문)

지금 아감벤에 관한 글을 미숙하게나마 번역하고 있고, 곧 그의 저서를 살 계획이었는데, 마침 교수신문에 이런 기사가 올라왔다. 아감벤에 관해 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그나마 길잡이가 될만한 글을 발견한 것 같다. (마침, 번역하는 부분도 아감벤의 '정치학'에 관한 부분인데, 많은 내용이 겹치는 것 같다.) 다시 새겨보는 의미에서 블로그에 옮겨본다.



21세기의 전지구적 주권과 민주주의 :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 주권의 한계는 민주주의 재발명을 통해 극복해야

홍철기 /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박사과정 http://www.kyosu.net/news/mailto.html?mail=soniclu0@snu.ac.kr


네그리(Antonio Negri)와 하트(Michael Hardt)의 “제국(Empire)”은 주권이 더 이상 개별 국민국가들에 머물러 있지 않고 전지구적인 차원으로 이행한다고 주장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제2차 이라크 전쟁 이후 미국은 그들이 “제국”에서 말한 ‘제국적(imperial)’이라는 수식어에 어울릴 전지구적인 보편적 주권자라기보다는 단지 하나의 헤게모니적인―그것도 군사력에 압도적으로 의존하는― 국민국가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다시 자리를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계경찰국가로 자처하는 미국의 군사적 개입에 있어서 국제법상의 절차적 요건뿐만 아니라 바로 ‘인도주의적’ 아우라 까지도 상당한 정도 상실한 것은 분명한 사실인 듯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비(David Harvey)가 말하듯이 ‘새로운 제국주의(new imperialism)’의 상황에 처해있는 것일까? 아직까지도 많은 비판자들이 말하듯이 “제국”의 관점을 낙관적인 것으로 치부한다고 해서 이 질문의 답이 자동적으로 나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제국인가, 새로운 제국주의인가

과연 현재의 상황을 예전의 제국주의와 구분시켜주는 ‘새로움’이란 무엇일까? 최근에 들어 두드러진 보수주의 법학자 칼 슈미트(Carl Schmitt)에 대한 관심은 이 새로움의 정체를 밝히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지적 흐름이다. 슈미트는 현재 미국의 집권 세력인 네오콘의 정신적 스승으로 지목되고 있는 정치철학자 레오 스트라우스(Leo Strauss)의 사상적 원천이라는 사실에서 학자들의 일차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하지만 보다 직접적으로는 미국산 ‘국가보안법’ 내지는 ‘긴급조치’에 해당하는 ‘애국자 법안(Patriot Act)’ 등의 일련의 초헌법적 조치들이 부시 대통령을 비롯한 현 미국 행정부를 ‘예외에 대해 결정을 내린다’는 슈미트적 주권자의 형상과 겹쳐 보인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예외란 법의 공백, 혹은 평상시의 법률을 적용해서는 해소될 수 없는 위기, 즉 비상사태이며 주권자란 바로 이러한 시기가 언제이고, 또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자라는 것이 슈미트의 결정주의 법학의 핵심이다. 슈미트는 독일 최초의 민주공화국인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도 비상시에 조치와 명령을 통해 통치하는 연방대통령을 진정한 주권자로서, ‘헌법의 수호자’라고 보았다. 실제로 애국자 법안을 비롯한 미국의 일련의 반(反)테러 입법은 테러 용의자에 대해 재판 없이 무기한 구금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는데, 이는 그 운용에 있어서 사실상 효력이 미국이라는 국민국가의 시민에게만 제한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는 한 국가가 다른 국가에 대해 군사력을 동원하여 침공하는 공식적인 전쟁행위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를 제기한다. 9·11 이후의 세계에 나타나고 있는 슈미트의 유령은 이제 정치를 둘러싼 논쟁의 수렴점이 단지 ‘국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권’ 자체에 있다는 점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 같다.

칼 슈미트와 아감벤의 주권론

슈미트에 관한 이러한 해석을 주도하면서 주권의 문제를 자신의 정치철학의 중심적인 주제로 제시하고 있는 사상가가 바로 이탈리아 철학자 지오르지오 아감벤(Giorgio Agamben)이다. 그는 이미 세 권을 발표한 자신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 연작에서 슈미트의 주권이론을 진지하게 대면함으로써 탈근대 정치철학이 처한 막다른 골목을 뛰어넘으려 하고 있다. 아감벤에 따르면, 주권이란 역설적인 개념이다. 이는 얼핏 보기에는 통상적인 주권에 대한 이론적 설명과는 배치되는 것이다. 주권이란 흔히 국내적으로는 최고의 권위이자, 국제적으로는 영토적인 상호배타적 관할권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굳이 국제정치와 국내정치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는 추세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주권에 대해 이런 방식으로만 이해하는 것은―그리고 꼭 슈미트나 아감벤까지 참조하지 않아도― 한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주권 개념에 고유한 난제들을 해결하지 못한 채로 남겨둔다는 인식은 이미 여러 가지 방식으로 지적되어 왔다. 예를 들어 국제정치학자인 크래스너(Stephen Krasner)는 1999년에 발표한 “주권(Sovereignty)”에서 국가주권의 이론과 현실 사이의 간극이 존재한다고 지적하며 이를 “조직적 위선(organized hypocrisy)”이라는 말로 묘사한 바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가 간의 상호 주권에 대한 인정 자체가 허물어지고 있지는 않지만 국가 간 주권 체계의 이념형이라 할 수 있는 베스트팔렌 체계에서와 같은 주권의 영토적 배타성의 원리는 현실적으로 빈번히 침해받는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인민주권(popular sovereignty)의 역사를 17세기 영국혁명으로부터 미국 헌법제정과정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통해 추적하고 있는 미국의 역사학자 모건(Edmund Morgan)은 “인민의 발명(Inventing the People)”에서 인민주권은 개념상으로는 국왕이나 의회가 아닌 인민만이 주권을 갖는다고 하지만, 그 역사적 출발점에서부터 명목상의 주권자와 실제 주권 행사자 간의 분리를 전제로 하는 일종의 가상(fiction)의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근대 주권의 개념은 수평적인 차원과 수직적인 차원 모두에서 상당한 정도의 애매함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주권개념 자체에 내재한 역설

슈미트나 아감벤이 제기하고 있는 주권 개념의 역설은 이념형과 경험적 실제 사이의 간극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는, 보다 본질적인 층위를 갖는다. 오히려 그들은 주권 개념 자체가 어떤 이중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봐야한다고 주장한다. 슈미트의 사상에 결정적인 이론적 선구자인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에게 주권자란 언제나 신민의 동의를 얻어서 그들을 대표하여 행동하는 인격체이다. 18세기에 루소(Jean-Jacques Rousseau)나 시에예스(Emmanuel Sieyes) 등에 의해 인민주권이 체계화되기 이전에 이미 탈-중세 사상가로서 홉스는 서구 기독교 왕국의 왕이 지닌 권력의 토대는 신이 아니라 바로 신민 전체의 동의라는 점을 이해했고, 그 점에서 그는 절대군주란 곧 세속 군주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시민론(De Cive)”에서 홉스는 왕이 자신의 신민 전체의 동의를 상실할 때는 폭군(tyrant)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신민 전체의 “적”이 된다고 적고 있다. 이는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 일반의지에 종속되지 않는 자는 ‘외국인’이라고 한 것과도 동일한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인민 전체의 동의로서의 ‘일반의지’가 주권자를 떠나면 그는 아무리 절대적인 권력자이더라도 정치공동체의 적이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홉스가 끊임없이 ‘자연 상태’라는 무정부적 혼란 상황의 공포를 담보로 해서만 주권의 절대성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것처럼 주권은 주권 자체의 위기에 대한 인식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슈미트는 주권이란 단순히 형식적인 법체계상의 최고 권력, 혹은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법의 ‘한계개념’이라고 규정한다. 즉 주권이란 이미 확립된 법체계(사회상태)와 그 법체계의 완전한 공백(자연상태)의 경계에 위치해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비상대권(emergency powers)을 행사할 수 있는 대통령은 법에 의해 주어진 권한에 따라 지금이 비상사태인지 아닌지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법질서 내부에 속한다. 그러나 동시에 대통령은 이러한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기존의 법조문에 규정되지 않는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법질서 외부에 대한 권한을 갖는다.

문제는 홉스에서 슈미트에 이르는 이들 사상가들이 주권의 역설을 정확하게 정식화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역설의 원천 자체를 드러내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에 있다. 홉스나 루소, 슈미트 모두에게서 근대 국가 간 체계(혹은 ‘적과 친구의 구분’)가 법질서의 외부와 내부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전제되고 있기 때문에 시민 전체의 적은 곧 ‘외국인’, 혹은 슈미트의 말을 빌리면 ‘자신의 영토로 되돌려 보내야할’ 정당한 적이고, 그래야만 한다. 그들은 다른 주권(국가)에 의해 대표되지 않는 내부의 ‘부당한 적’, 혹은 내부에서 배제되는 자들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아감벤은 우리에게 근대에서 벗어나 고대 그리스로부터 시작되는 서양 정치 전체의 역사를 참조할 것은 권고한다. 그는 슈미트의 ‘적과 친구의 구분’보다 더 시원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구분, 즉 ‘폴리스에 속한 인간의 삶(bios)’과 ‘삶이라는 사실 자체(zoe)’에 대한 구분으로부터만 주권의 역설이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 이 구분의 문헌학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란이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Politics)”에서의 보다 유명한 표현에서 등장하는 ‘신이거나 야수’일 수밖에 없는 인간인 폴리스의 절대적 이방인―다른 폴리스의 시민이라는 상대적 의미와 구별되는―이라는 형상이 이 구분을 통해 보다 더 명확하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호모사케르, 법 바깥에 붙들린 자


법질서로부터 최대한 배제된 인간 삶의 형태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를 아감벤은 고대 로마법에서의 ‘호모 사케르’로부터 찾는다. 호모 사케르는 서구 문명의 근간을 이루는 종교적 질서와 세속적 질서 양쪽으로부터 철저하게 배제된, 말하자면 이중으로 배제된 인간 삶을 지칭한다. 한편으로 종교적 질서로부터 배제되었기 때문에 제물로 바쳐질 수 없고, 동시에 세속적 법질서로부터도 배제되었기 때문에 호모 사케르를 살해한 자는 처벌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 갖고 있는 목가적인 뉘앙스와는 완전히 반대로 호모 사케르란, 누구로부터든 주권적 권력, 즉 생사여탈권의 행사 대상이 될 수 있는, 모든 능력과 권리가 박탈된 인간 삶의 형상을 보여준다. 폴리스와 법에 대해 일종의 예외로서만 존재하고 인식되던 이러한 인간 삶의 형태는 정치가 전면화 됨으로써 ‘인간’이 곧 어떤 국가의 시민권자를 의미하게 되는 근대를 지나―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말을 빌리면― ‘예외가 규칙이 되는’ 탈근대적 상황에서 주권의 역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게 된다. 바이마르 헌법이 완전히 중지된 상태에서 나치의 강제수용소로 보내진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로부터, 삼청교육대의 피해자들, 그리고 관타나모 수용소의 수감자들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현대의 호모 사케르의 계보를 추적할 수 있다.
아감벤이 이들의 삶에 주목하는 것은 단지 이들이 인간의 삶의 비참함의 극단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들을 통해 주권의 역설이 그 극단에 도달함으로써 주권 권력의 한계, 혹은 난국이 온전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러한 주권의 역설(그리고 아마도 근대 민주주의의 심층적인 위기)은 단지 외부의 적을 선포함으로써 적과 친구의 구분에 의해 해소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1960년대에 슈미트와 아렌트가 공히 “세계적 내전(Weltburgerkrieg)”이라고 보았던 냉전을 넘어선 새로운 비상사태인 “전지구적 내전(global civial war)”에 이르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정치적인 것’과 민주주의의 재발명은 바로 예외로서의 호모 사케르의 전면화에 관한 인식을 피해갈 수 없다고 아감벤은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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